지계리(각계2리) 유래

지계리(각계2리)의 유래
1. 현 각계2리에 동리가 언제 생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 동리 이름은 신라 진흥왕 15년(554)에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현 옥천)을 침공 했다가 대파당하고 퇴각하다가 이곳에서 또 격전을 하였는데 특히 핏골에서 전멸하였으므로 그 후로 이 골짜기를 '핏골'이라 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굳게 지킨땅'이란 뜻과 '불굴의 의지로 대성하라'는 대길 운을 따라 '지계리(枝界里)'라 지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영동군지에도 위 전설이 있고, 또 조선 영조 36년(1759)과 고종 32년(1895) 기록에 이곳을 '충청좌도 영동현 서이면 지계리'라 하였으며, 순종 3년(1909)에는 이동리 출신 의병장 김평근의 체포보고서와 경성공소원 판결문에 그 주소가 영동군 서이면 지계리라 되어 있으니 현 각계2리가 지계리 였음이 분명하다.
2. 1913년(국치 3년후)에 일제가 서둘러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그 이듬해부터 시행하며 지계리를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覺係里)라 고쳤다. 이는 이 동리 출신 애국지사 김용호 부자의 순국과 항일 사실을 지우려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동리 이름마져 없앤 것으로 본다.
3. 1968년경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위 각계리에서 점촌, 회곡, 직동의 3마을을 떼어 각계2리라 하였는데, 1995년에 동리 주민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잃었던 전통적이 옛 동리명 지계리를 되찾아 병용하기로 결의 하였다.
4. 각계2리(지계리) 소속마을
(1) 지계동(지계말): 원래 지계말이던 마을 이름이 언제부터인지 점말로 바뀌었는데 이는 마을 뒷편에 옹기점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옹기점이있던 있던 시절에 생긴 일인 듯 하며, 1995년 주민들이 동리명을 지계리라 함과 아울러 지계말도 되찾아 쓰기로 결의하였다.
(2) 희곡(가막재): 마을 서편 골짜기에 점토가 있으므로 생긴 이름인듯 하며, 한때 서당이 있었으므로 서당골이라고도 한다.
(3) 직동(핏골): 피(稷)가 많이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 하며, 위 1항의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제 이 동리가 생긴 이래로 긴 세월을 이어 동리를 가꾸어 주신 선인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우리 주민들이 동리 발전을 위하여 더 한층 단합할 것을 다짐하며, 후대들이 더 밝게 긍지를 가지고 전진할 것을 기대하여 온 주민의 힘을 모아 유서 깊은 이 느티나무 쉼텅 이 비를 세운다. 이글은 영동군지에 의하여 썻음을 밝힌다.
2006년 11월 주민일동.






永同 覺溪里
金溶昊 父子顯彰碑는
영동천변의 각계 2리 점말 마을 입구 천변에 위치.
비는 지대석 위에 1석으로 조성된 귀부가 놓였는데 귀갑은 6각이며 그 상면 중앙에 장방형의 碑座가 시설되어 있다.
비는 163×58×28cm의 크기이며 전체는 300cm이다.
이수는 여의주를 물은 두마리의 용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전면에 '애국지사 덕산 김용호선생 송재 김평근선생 부자 현창비' 라 음각되어 있으며 좌우 및 후면에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1997년에 국가보훈처장과 영동군수가 세웠으며 성균관 전학 연일후인 정희택이 짓고 증손 章圭가 썼다
金溶昊(1843~1910)의 본관은 金寧 號는 德山이다. 金文起의 15세손으로 한일합방의 잘못을 역설하며 일진회 조직을 분쇄하는데 힘썼다.
金平根(1870~1924)은 김용호의 4남으로 字는 云七 號는 松齋이다.
김평근은 1907년 거의한 張雲植 의진에 참가하여 영동과 금산 일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www.gimhae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73
일제 만행 폭로한 애국지사 김용호 행장(行狀) - 김해일보
당시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지자 성과 궁궐은 폐허가 되었으며 왕명은 끊어졌고 강토는 휩쓸려 백성들의 문드러진 삶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또 악독한 저놈들 세력은 불이 치
www.gimhae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