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2. 10:00ㆍ2020. Ours
우리 마을 부상리는 대평(大平) 부상(扶桑) 도천(道川) 삼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면적 3.9Km에 157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매봉산 자락에 터를 잡아 1759년에는 충청도 영동현 북이면 와촌(瓦村)리로 이름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해돋이마을)로 개칭되었다. 우리 마을은 약 350여년전 청주 한씨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여흥 민씨, 경주 김씨, 선산 곽씨, 개성 김씨, 경주 최씨, 밀양 박씨, 양주 조씨, 동래 정씨, 나주 오씨, 제주 고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연일 정씨, 합천 이씨, 등이 살고 있다.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고종 4년(1867)경 명성황후의 당질인 민영주가 부상리 448-2번지 일대에다 99칸의 기와집을 세우고 거처하다 상경하였고, 1910년 경에 마지막으로 헐려졌다 한다. 고종29년(1892)에는 민대혁에게 나라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 직함을 추서하여 정려(孝子)문을 건립케 명하시어 현재 군 문화재로서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한문유 처사 원봉 선생은 선비로서 최초로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으며,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대평동에 유허비를 세웠다 한다.
앞에 서있는 수호신석은 1740년경부터 남석(男石)만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경 어느날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여석(女石:여자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어 길골 7동의 장정들이 여석을 운반하여 마주보게 하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녕과 풍년이 들었다고 하여 지금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에는 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서쪽에 있는 부상 형석(螢石)광산은 조선 말기부터 있었으나 한일합방 후에는 사업이 번창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한산 인부가 300~400명이 넘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 전국에서도 명성있는 광산이었다 한다.
한편 1946년에는 부상국민학교가 인가되어 한때는 전교생이 600여명을 넘었을 때도 있었으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인하여 1995년에 폐교되어 4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라져가는 민속 길골목도요를 재현하여 KBS 제1TV 일요산책 '전국은 지금'에 방영된 바 있으며, 전 주민이 합심하여 제24회(1991년) 난계예술제 식전행사에 참여 목도요, 디딜방아타령, 쌍맹이질 등을 출연하였고 1994년에는 KBS 제1TV '맛따라 길따라'에도 전 주민이 참여하여 방영된바 있다.
교통편으로는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영동터널)가 본동을 관통하고 있으며 1993년에는 용산과 심천을 잇는 용심도로가 확포장되어 마을 앞을 관통하고 있다. 1983년에는 부상 보건진료소가 국가 지원으로 개설되어 자체 운영되고 있으며, 지역 보건 사업에 크게 이바지를 하고 있다.
이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품성과 높으신 덕을 글로 새겨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가르침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온 마을 주민과 출향인 모두가 뜻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한다.
1996년 3월 지은이 민병제
2011년 52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회서 단체 은상과 개인 연기대상을 수상한 [질골 막장소리] 기념비가 남근석 옆에 있다. 영동군 용산면 질골 '형석광산'은 조선 중엽에 개장되었으며 일제 강점기까지 채굴하고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폐광된 형석(螢石 Fluoite) 광산에서 전국 최대였다.
[질곡 막장소리]는 이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호흡을 맞춰 작업의 효율을 높이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하여 불러졌던 노동요로 현재 용산면 부상리 질골의 주민들에게 명맥만 이어지고 있다.
질골 막장소리 영상 : https://youtu.be/yBYw9C9jUic
질골은 질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상리의 남근석과 여근석
(남근석을 세운시기를 1710년(숙종36년) 경으로 스님이 진ㄴ때를 1940년 경이라 하는 글도 있다)
부상리 입구에 있는 남근석(절골막장소리 기념비 옆에 위치)과 여근석(남근석 맞은편에 위치)으로 이는 마을입구에 마주보고 서 있다. 남근석은 숫탑, 남석이라 하고 여근석은 암탑이나 여석이라 부르는데 두 돌을 합쳐 자웅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근석의 크기는 약 266cm이고, 여근석은 140*203cm가량으로 한쪽은 남근석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돌들은 보은으로 통하는 옛 도로옆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본래에는 남석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한 노승이 지나다가 가뭄을 해소하기 위하여는 여석이 있어야 한다며 그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여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마을에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말의 편자를 만들던 말챙이 라는 곳이 있었다. 그 곳에는 남근을 닮은 바위 하나가 오래 전부터 서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마을을 지나던 중이 바위를 보고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혀를 차며 남근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중이 대답하기를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암돌이 있는데, 숫돌이 암돌을 그리워하며 날마다 울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암돌과 숫돌을 같이 있게 하지 않으면 이 부근 동리에 커다란 재난이 따를 것이며, 앞으로 다시 바위를 멀리하게 하는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게 될것이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동리 사람들은 근처의 산과 골짜기를 샅샅이 뒤져 나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가곡리 창바위골에서 여자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을 한 암돌이 발견되었다. 바위를 찾은 사람들은 인근 5개 마을 사람들을 모아 합동으로 숫돌 옆에다 짝을 지어 주었다. 그 뒤 별탈없이 마을은 평안을 찾았다.
그런데 부상리에 사는 민OO씨가 집을 지으면서 숫돌과 암돌을 현재와 같이 도로 양쪽으로 떨어뜨려 놓게 되었다. 그런데 민씨는 바위를 옮겨놓고 얼마 못가서 부인을 잃게 되었다. 평소 건강하고 병원에도 가 본적이 없는 민씨의 부인이었는데 이렇다 할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돌을 옮겨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수군거렸지만 민씨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자웅석을 원래대로 옯겨 놓지도 않았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따금씩 까치와 까마귀들이 민씨 집 유리창에 날아와 울부짖고, 머리를 들이받으며 죽는 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민씨는 돌을 다시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 뒤로 민씨는 두번 재혼을 했는데 새로 맞은 부인 두명이 다 정신이상으로 가출해 버렸다고 한다.
민씨가 죽고 나서 마을 사람들은 돌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 남근석과 여근석을 마주보게 하였고, 동제를 지낼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뒤 신기하게도 기이한 일들이 모두 사라지고 마을은 평안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큰골마을 사람들은 정월 보름날에 맞추어 자웅석에 제를 지내고 있다. 새마을운동 때 단절되기는 했지만, 동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불상사가 많이 생겨서 다시 제를 지내게 된것이다. 제는 정월 초부터 준비에 들어가는데 가장 먼저 동계에서 유사 두명을 정한다. 한명은 제의를 준비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명은 제를 지내는 사람이다. 특히 제의를 담당한 유사는 몸을 정갈히 하고 부정한 것을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듣는것, 보는 것도 금해야 한다. 그만큼 제의를 지내는데 정성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제의는 남근석에만 지내는데, 2~3일 전에 먼저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제의 장소와 남근석에 부정한 기운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물은 백설기와 삼색실, 메, 명태, 포, 술등을 준비하고 정월 14일 밤 12시경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제의가 끝나면 마을공동 소지와 마을사람들의 소지를 올린다.
제의가 끝나고 만약 동네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면 모든 책임은 유사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서로 유사를 맡지 않으려고 미루기도 한다.
부상리의 남근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신통력을 지닌 존재이며, 마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남근석과 여근석이 함께 있어야 하는것은 음양의 조화와 결부된 것이다. 이는 선돌이 지니고 있는 생산기능을 믿어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것이다.
선돌에 대한 생산성의 믿음은 단지 아기를 점지해 주는 능력뿐만 아니라 곡식의 풍요로운 수확에도 영향력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남근석과 관련해 전해지는 신비한 이야기는 선돌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부상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여겡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남근석이 단지 성(性)의 상징이 아닌 풍요의 상징으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자료출처: 중앙대 민속학과 김종대)
부상(扶桑)은 해돋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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