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장(3,8일 개장 되는 5일장)

2020. 11. 12. 12:182020. 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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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내(深川) 5일장 - 현재는 폐장

 

 

 심천장은 3일과 8일에 섰다.

 

 심천장이 언제부터 섰는지 확실하게 고증 할 수는 없어도 오래된 장임에 틀림없다. 신동국여지승람에도 심천원이 있었고, 경상우도를 가는 길었으므로 심천은 역사가 깊은 중요한 관로(官路)였다.

 

 경부선이 개통되고 대전이나 영동에서 장사꾼들이 많이 와서 성황을 이루었던 장이었다.

 

 장사꾼은 주로 기차로 왔다. 주민들은 농산물과 가축을 장에 지고 이고 와서 내다 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간다. 심천장에 오는 주민들은 심천면민이 다수이지만, 타군 타면에서 더 많이 왔다. 심천장에서는 사려는 물건은 싸고, 팔려는 곡식과 가축은 다른 장보다 값을 더 받았기 때문이다. 요체는 기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쪽방면 용산면에서는 시금리, 부상리, 한성리, 금곡리 주민들이 걸어서 장에 다녔다. 그러다가 일제때에 부상리에 형석광산이 개발되고 심천역까지 형석을 운반하기 위한 도로가 개통되었으나 버스는 1970년대에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장꾼들은 여전히 걸어 다녔다.

 

 서쪽방면에서는 옥천군 이원면 지탄리 사람들이 많이 왔다. 거리가 가깝고 적등강(금강)을 건너기 어려우면 심천장으로 온다. 이원 원동에 달이산이 있고, 산아래 적등강에 지탄나루가 있다. 나루를 건너 원동사람들도 심천장에 왔다. 적등강 물을 따라 조금가면 옵뱅이 동네가 나온다. 이곳이 우암 송시열이 태어난 마을인데 어머니 곽씨부인이 꿈에 적등강물을 마르드록 마시고 달이산을 통째로 치마폭에 싸안는 꿈을 꾸고 송시열을 낳았다고 한다.

 

 절골에 가까이 오면 길강 조손충효당정려문이 있고, 우화루가 있었으며, 여기에 강이 있고 깍아지른 절벽 동대가 있다. 강가에 있는 원골에는 국가가 운영하는 원(院 국가운영 숙식업소)이 있었다고 하며 심천원은 영동으로 해서 황간을 거쳐 추풍령을 넘는 중요한 관로였다. 각급 주후(州侯)들이 부임하는 길이요, 체직(遞職)이 되었을 때 환경(還京)하는 길이다.

 

 일본의 사신이 부산포에 내려 추풍령을 지나면 황간현, 영동현을 거쳐 지계리 점말에 서 가막재를 넘어 용당리를 지나 심천 나루를 건너 심천원에서 쉬어서 가는 중요한 길이었다. 지금은 경부선 철도가 지나간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의 진격로이었는데, 노효자 박인(朴忍)공이 60세 노인으로 80세 아버지를 업고 왜군을 피하다가 뒤 쫓아온 왜군에게 한칼에 두분이 피살되었다. 그리고 조선 인조때에 손자 박동룡(朴東龍)공은 무과에 급제하고 집에서 대기하며 농사를 짖고 있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에 박동룡공은 공주로 달려가 자진입대하여 충주전투에서 전사했다. 나라에서 현령으로 증직하고 정려를 내려 '조손충효정려문'이 지탄과 절골사이 큰길가에 세워주었다.

 

 북쪽 청성면 방면에서는 쇠종골, 방아골, 높은베루, 강촌, 합금리, 새분이, 양저리 등에서 당재를 넘어 심천장에 왔다. 또 동이면 박우데미(우산리) 사람들이 왔다. 이곳은 옥천군인데 청산장은 큰 산이 가로막고 옥천장은 금강이 가로 막을 뿐 아니라 거리가 멀어서 거리가 가까운 심천장에 당재를 넘어 다녔다. 당재에서 심천에 오는 큰길이 지금은 폐도가 되었다. 장꾼들의 길일뿐만 아니라 광산에서 흑연을 실어내는 길이었고 경부고속도로 공사때는 당재터널 공사에 필요한 대형 장비차량과 제반물자와 기술자, 노동자들이 심천역에서 내려 이길로 다녔다. 그러다가 단전리, 길현리, 당재로 해서 청성에 이어지는 2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다니는 사람이 없게 되자 길도 허물어지고 그 크길에 잡초가 무성하다.

 

 당재 주막(말쟁이 말 이라고 하는)이야기

 

 주막 이래야 토담집이었다. 그러나 항상 붐볐다. 방이 셋이 있는 사랑채가 있었는데 지적도를 떼어보니 묘하게도 아랫방은 심천이었고, 윗방은 청성면이요, 건넛방은 동이면이었다. 하루는 청성지서에서 순경들이 단속을 나왔다. 청성면인 윗방 사람들만 노름을 한다고 잡아 갔다. 또 하루는 심천지서에서 단속이 나왔다. 심천지서 순경도 아랫방에서 노름하는 사람만 잡아갔다. 이렇게 그들의 지서 관내에만 단속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로는 노름꾼들이 순사들을 어떤 지서ㅓ 순경인가를 알아보고, 순경이 근무하는 지서와 다른 방으로 옮겨 가면 붙들려 가지 않는다고 한다. 한마디 더 하자면 청성면 순사나 동이면 순사는 같은 옥천경찰서 관내는 돌아보지만, 경찰서 관내가 다르면 모른체 외면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심천장은 영동에서 몇째 안가는 큰장으로 꼽았다. 심천장은 번창한 장이었다. 따라서 심천-당재길이 청성면, 동이면 장군들의 큰 길이었다. 이 당재는 경부고속도로 공사 때 터널붕괴로 많은 사상자를 낸 그 당재터널이며 그 위의 당재는 옛날부터 역사가 깊은 고개이다. 당재와 이원면 지탄리 경계되는 정상은 삼국시대 지탄산성이 있다. 이 지탄산성은 옥천군에서 먼저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지탄산성으로 이름 붙였고, 영동은 근소한 차이로 이름을 뺏기고 길현-지탄산성이라고 한다.

 

 심천에서 이 당재를 넘으면 좌측 첫번재는 우산리로 내려가는 길이고 400m쯤에 메주골 날망에서 왼쪽길은 높은 베루로 가고, 오른족은 쇠중골, 방아골(묘금리)로 가서 방아골에서 왼쪽길은 양저리로 가는데, 조금 더 가면 보청천이 나아고 천변길로 강촌에 가면 금강을 만난다. 남쪽은 우데미(우산리), 북쪽은 합금리이다. 금강 건너편은 조령리이고 쭉 강을 따라 북쪽길로 가면회덕(대전), 서쪽으로 가면 문의에 가고, 피반령 큰재를 넘어서 청주에 간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난 뒤에 심천장은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고속도로에 '부상' '묘금' '우산리'에 완행버스 정류장이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청성면, 동이면, 용산면 장꾼들이 버스를 타고 옥천, 대전의 큰 장으로 다니게 되자 심천장은 우시장(牛市場)이 문을 닫고 장사꾼들이 하나, 둘 오지 않던니 지금은 장이 되지 않았다. 심천사람들은 농협 구판장이나 가게를 이용하고 대전과 영동에 교통이 편리하여 장이 안되어도 아쉬움을 모른다.

 

이로서 심천장은 옛날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렵게 되었다.

 

(출처: 글쓴이 승천 이규삼)

 

 

영동군 심천면 심천리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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